AI와 같은 첨단 기술은 컴퓨터, 자동차, 핸드폰 등 우리 일상에 직접 활용되는 매개체를 통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기에,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기술의 기능과 성능에만 주된 관심을 기울이며, 이에 대한 논의에서도 기술의 가시적인 측면에만 집중한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가 늘 감지하지 못하고 놓치고 있는 것은 애초에 각 기술 배후에 놓여있는 테크놀로지 자체의 특성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며 AI를 비롯하여 나노기술, 로보틱스, 메타버스 등 다양한 첨단 기술들이, 마치 동물 서커스에서 사자, 원숭이, 앵무새가 각기 독특한 기술로 묘기를 부리면서 짜잔 하며 줄을 이어 등장하는 것처럼 계속 등장하고 있기에, 우리는 각 기술이 서로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실상은, 각 기술이 우리에게 선보이는 각자의 특성 이전에 이들을 가능하게 해준 테크놀로지 자체의 특성이 처음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이는 서커스에서 선보이는 동물들의 각기 다양한 묘기가 실제는 애초에 그들을 훈련시켰던 사육사의 능력이자 공연 계획적 특성에 의해 만들어진 것과 유사하다. 이런 점에서 AI를 비롯한 첨단 기술 각각의 눈에 띄는 특성을 논하기 이전에 이들의 배후에서 이들을 가능하게 해준 테크놀로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살펴보는 작업이 우선적이며 필수적이다.

   테크놀로지에 대해 철학적으로 조명한 선도적 인물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신학자 자끄 엘륄(Jacques Ellul)이다. 그는 테크놀로지가 처음부터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하였고, 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였다. 그가 찾아낸 대표적인 테크놀로지의 두 가지 특성은 지금 살펴볼 합리성(rationality)과 다음에 살펴볼 인공성(artificiality)이다.

 

   우선 엘륄이 말하는 테크놀로지의 합리성이란 근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등장한 모든 신기술들이 그래왔듯이, 인간 이성의 산물로서의 테크놀로지의 특성, 즉 근대 과학을 일으키고 발전시켜온 인간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 이성의 합리적 절차에 따라 진보되어온 테크놀로지의 기본 특성이다. 이러한 특성을 분석하며 그가 강조하는 것은, 합리성이라는 특성을 지닌 테크놀로지가 비합리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합리적인 절차를 따르는 자신의 기술들을 동원하여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엘륄이 말하는 테크놀로지의 합리성은 기독교의 종교적 사고와 틀에 근본적으로 상충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적 신념 혹은 신앙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합리적으로 도출되고 설명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상충은 인간의 이성을 통한 진화론적 사유로부터 출발하는 과학과 신의 섭리를 통한 창조론적 신앙으로부터 시작하는 종교 사이에 있어온 오래된 상충이다.

 

   그런데 테크놀로지의 합리성을 전통적인 과학의 합리성과는 달리 더욱 유심히 고려해야 하는 이유는, 엘륄이 분석했듯이 테크놀로지가 자신의 구체적인 기술들을 사용하여(종교로 대표되는) 합리적이지 않은 모든 것들을 비합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합리적 절차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엘륄의 시대와는 달리 인터넷이나 첨단 통신 기술들이 21세기 현대인의 삶 전반에 미치는 실질적인 영향력을 생각해보자. 그러한 기술들을 통해 테크놀로지가 자신의 합리성을 현대인들의 사고와 삶의 패턴에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적용시킴으로써 합리적이지 않은 것들은 잘못되거나 틀린 것으로 인식된다면, 결국 모든 것이 합리적이어야 마땅하도록 만들었음을 간파해 보면, 테크놀로지의 근본적인 특성인 합리성이 현시대와 현대인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흔히 회자되는, 테크놀로지의 가시적이고 현상학적인 영향력보다 더욱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작금의 AI시대에 이처럼 합리성을 판단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경향은 실제로 교회의 문화 속에도 이미 팽배해 있다. 예를 들어 목회자의 설교 내용 중 합리적이지 않은 내용들이 등장할 때 합리성을 판단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현대인인 교인은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인식되는 기술 장치인 컴퓨터나 핸드폰을 활용하여 가장 합리적인 설명을 해주는 것으로 인식되는 인터넷 검색 사이트를 통해 본인이 느꼈던 대로 목회자의 설교 내용이 비합리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청년의 모습은 요즈음 어느 모임이나 행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얼핏 보면 장소는 어느 행사장이나 공연장인 것 같고, 누군가 열심히 강의나 연기를 하는 상황인 것 같으며, 앞줄에서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는 어른들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이 청년은 고개를 넌지시 숙이고 핸드폰을 보며 딴짓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 전혀 다르다. 실제 장소는 행사장이나 공연장이 아니라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교회의 예배당이고, 누군가 강의나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1년 중순, 미국 미주리주 오팔론(O’Fallon) 모닝스타교회에서 목사님이 주일 예배 설교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사진에서 클로즈업된 청년은, 기성세대들이 설교에 집중하는 동안 핸드폰으로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목사님의 설교를 가장 경청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교회의 마이크 쉬라이너(Mike Schreiner) 목사는 기존 교회의 일방적인 강의식 설교를 지양하면서 본인의 설교 시간에 교인들이 핸드폰으로 마음껏 문자를 발송하며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설교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방식대로 설교 듣기에만 집중하는 앞줄의 어른들과는 달리 목사님의 목회 취지와 요청대로 이 청년은 설교 내용에 관해 실시간 문자를 보내며 상호 간 소통하고 있기에 이 청년이야말로 설교에 가장 몰입하고 있는 교인인 것이다.

   이런 신문 기사를 읽으면서 바로 떠오르는 긍정적인 생각은 아마도 이러하리라 본다. 기존 교회와 달리 이 교회는 핸드폰까지 활용하며 설교자와 교인이 소통하는 참신한 방식을 통해 정말 AI시대에 부합한 선도적인 목회를 하고 있구나! 물론 맞는 말씀이다. 첨단과학기술 문명을 살아가는 기독교인으로서 현시대를 제대로 분별하여 핸드폰과 같은 테크놀로지를 활용함으로써 AI시대에 부합한 교회로 나아가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반드시 숙고해야 할 점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테크놀로지의 근본 특성이 테크놀로지를 활용하는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력이다. 핸드폰과 같은 기술이 긍정적으로 보여주는 가시적인 차원 이면에, 그 기술을 가능하게 해주는 테크놀로지의 근본 특성이 끼치는 보이지 않는 지대한 영향력을 함께 숙고해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사진에 보이는 청년이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궁금한 내용에 대해 목사님에게 핸드폰 문자로 질문을 보내는 대신에 인터넷 검색을 해본다고 가정해보자. 딴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더욱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설교 중 인용한 어떤 예화나 어느 책의 내용이 인터넷에서도 전부 동일하게 검색되며 그 예화나 책 내용의 취지도 목사님의 설교의 취지와 일맥상통한다면, 이 청년의 설교 몰입도와 설교자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본 예화나 책의 내용에서 설교자가 말한 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발견되거나 목사님의 설교 취지와는 다른 취지의 내용이 나타난다면, 이 청년의 설교 몰입도와 설교자에 대한 신뢰도는 어떻게 될까?

   중요한 점은, 만약 기대했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이 있는 것으로 인터넷 검색에서 확인이 되었을 경우에, 이러한 확인은 사실 확인 자체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잘못된 것, 틀린 것이라는 도덕적 판단으로까지 귀결된다는 점이다. 즉 핸드폰과 같은 합리적인 첨단 테크놀로지의 합리적인 사실 조사 과정을 통해 확인된 사항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은 합리적인 것과는 다른 것 곧 비합리적인 것이라는 단순 비교로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이지 않은 것 곧 비합리적인 것은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결론은, 그러한 합리적인 조사와 확인 절차 이전에 첨단과학기술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사고와 삶 속에 이미 비합리적인 모든 것은 잘못되거나 틀린 것이라는 판단의 기준이 선험적으로, 일반적으로, 상식적으로 확고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런 사고와 삶의 방식 및 판단 기준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테크놀로지에 의해 근대 계몽주의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알게 모르게 지속적으로 고양되어 온 것이다.

 

   몇 세기에 걸친 이러한 과정 속에서 테크놀로지적 합리성의 기준과 틀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인 목회자의 설교 내용들(예를 들어 하나님, 성령, 예수의 십자가 고난, 희생적 사랑 등)은 현대인의 합리적 사고와는 다른 종교적 신념 정도가 아니라 현대인의 도덕적 판단 기준인 합리성에 잇대어 볼 때 다름을 넘어서 틀린 내용, 그러하기에 거부되어야 마땅한 잘못된 신념으로 점차 매도된다. 물론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동정녀 사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났다는 부활 사건 등 기독교의 주요 신앙 사건이 비합리적인 내용이기에 이러한 매도에 대처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테크놀로지의 근본 특성이 합리성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여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예를 들자면, 적합한 자료 제시, 합당한 예화 인용 등)에 있어서만큼은 합리적인 소통의 방식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21세기 첨단과학기술에 의해 주도되는 AI시대의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사안의 본질적인 심각성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신학적, 철학적, 존재론적 분별력은 필수적이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신앙의 내용들이 비합리적으로 비칠 수도 있고, 그래서 비판을 받거나 외면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합리성이라는 잣대만을 가지고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으로 규정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이러한 분별력은 더욱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AI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들을 필두로 한 교회 관계자들은 엘륄이 지닌 통찰을 익히고 공부하여, 기독교 신학과 교회 신앙의 존재론적 특성이 합리성과 같은 테크놀로지의 존재론적 특성과는 기본적으로 다르며, 따라서 어느 하나가 판단의 일방적 기준이 되어 그와 다른 또 하나를 틀렸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쉽게 규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짚어주고, 이를 현대를 살아가는 교인들에게, 지인들에게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김동환은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하고, AI를 비롯 첨단 테크놀로지를 신학적으로 비평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기술에 의해 강화된 인간인 포스트휴먼에 관한 급진적 철학사조 트랜스휴머니즘을, 학술 논문(2011년)을 통해 국내 신학계에 최초로 소개했다. 과학기술 문명 시대를 사는 인간을,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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