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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당연시되고 있다. 무한한 욕망에 제한된 자원을 합리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학의 목적이라고 말할 때, 경쟁은 불가피하거나 필수적이라고 강변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해 없이 경쟁시장의 개념과 역할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경쟁이 기본적으로 무엇인지 이해하게 된다면 경쟁/경쟁시장을 당연시하는 자본주의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미스가 에 앞서 세상에 내놓은 책인 은 경쟁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간접적으로 설명하였다: “부러움의 대상인 이런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6.10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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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는 인간이 있을까? 자본주의를 만든 것은 인간이지만, 자본주의는 인간에 대한 관심과 배려보다 자본의 증식과 축적, 효율성 증진을 통한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그렇기에 계급의 양극화와 소득의 불평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인간됨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에는 인간이 없다. 예컨대, 불경기의 국면에서 기업은 자구책으로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이러한 노동자의 대량해고는 수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인 노동자의 삶을 위축/파괴시키는 절대 요인이 된다고 볼 때, 자본주의에는 인간이 없는 것이다.이를 ‘분노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5.27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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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사회가 갖고 있는 확고한 입장은, 자본은 자본가의 것이고, 노동(력)은 노동자의 것이기도 하고 자본가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기조는 경제의 주체는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 혹은 자본가가 소유한 자본이고, 그 객체는 노동(력) 혹은 노동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수사(修辭)의 결국은, 노동은 자본에 종속되어 있고, 노동자는 자본가에 의해 생사여탈이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더욱이 모든 법과 제도, 그리고 규범조차도 자본가는 갑이고, 노동자는 을로 정리를 하고 있으니, 자본은 왕이고, 노동은 종일뿐이다. 노동자는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5.1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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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성과 단순성을 띠는 자연의 법칙과는 달리 경제적 상황은 다양한 경우(境遇)의 문제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주류경제학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는 개별적 특수성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늘 ‘가정’(假定)을 전제로 자신들의 이론을 전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학을 과학적 객관성에 기반한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데서 알 수 있다. 특히 경제학을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으로 구분하는 이유가 이런 복잡성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의 의사결정에 따라 나라 경제의 전체 변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4.27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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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가 꿈꾸는 세상은 사자들과 어린 양들이 함께 뛰노는 세상이다. 더 이상 힘이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힘이 공유되고, 더 이상 계급의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가 아니라 계급이 철폐된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책무라면 이를 경제 개념으로 읽었을 때, ‘소망(내일)의 경제’를 만드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책무일 것이다. 그런데 힘과 계급이 지배하지 않는 세상/사회는 가능할까? 이 질문은 지금까지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늘 제기된 질문/시비이다. 과연 불가능한 이상이고, 유토피아적인 상상일까? 그리스도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4.1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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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질문해보자. 기본 의식주의 문제가 해결된다면 경제의 모든 문제는 점차 나아질까? 일정 정도 나아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은 본질이 아니고, 현상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의식을 바꾼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는 프로이트의 지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또한 의식을 형성하는 것은 물적 토대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가 자기결단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단순히 현상을 바꾸시겠다는 것은 아니라, 사람과 세상을 전복(顚覆)시키러 오신 것이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3.25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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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와 그리스도교와의 애증 관계를 묻는다는 것이 생뚱맞은 것 같다. 그러나 욕망과 이익, 그리고 생산성을 추구하는 경제(학)의 입장에서 종교가 욕망과 소유의 태도를 자신들과 달리한다고 보았을 때 애증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하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욕망과 소유를 멀리하는 것이 종교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이것에 노예가 되어 있는 종교를 볼 때 경제(학)는 어떤 애증을 품게 될까? 반면 종교는 경제(학)에 대해 어떤 애증을 품을까?신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자본주의가 내놓는 모든 주장과 이론은 인간의 자율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3.17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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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예수의 메시지 중에 가장 왜곡되는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나 보이는 태도라며 이런 염려의 태도를 정죄하기 때문이다. 과연 이런 염려는 정죄를 받을 일일까? 예수께서 주의를 시킨 것은 의식주의 기본적 해결이 아닌 해결 이후의 소유 혹은 소유의 집착에 대한 것이었다. 세상 창조가 기본적인 것들에 관한 것이었듯, 의식주는 인간의 삶에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지적한 ‘무엇’은 ‘얼마나’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러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3.0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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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은 집이 필요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방랑자처럼 사셔야 하니 자신을 따르면서 이런 삶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셨다. 더욱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살려면 신앙인이든 누가 됐든 다 의식주(衣食住)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 의식주는 인간의 생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 먹고 사는 문제가 공동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3.03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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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가 갖는 위대함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용서와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갈등이고, 삶이 불화인 현실에서 종교는 보호소고 피난처가 됩니다. 그런데 종교가 위험한 것은 성속(聖俗)이원론이라는 분리주의에 빠질 때입니다. 그리스도교의 분리주의는 대체로 고린도전서 6장 14~16절에 근거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과연 이것이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3.03 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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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부 터툴리안(Quintus Septimius Florens Ter tullianus, 155~240년)이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신학과 인문학의 상관성에 대해 부정적 시비를 했다. 이 시비는 오늘 ‘그리스도교와 경제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질문으로도 바꿀 수 있다. 그리스도교가 세상 것에 관심을 두는 종교가 아니니 경제에 무관심한 것이 신앙적이라는 입장에서 나오는 질문인 것 같다. 신앙이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는 말로 보면 이해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넘는다는 것이 현실을 무시한다는 것이냐,
그리스도교와 경제
이동춘
2020.02.28 1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