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사도행전 17:28).

 

   기원전 600년경 끔찍한 전염병이 아테네를 강타했다. 사람들은 아테네의 많은 신들 중 한 신이 화를 내서 전염병을 가져왔다고 믿었고, 희생 제물이 바쳤지만 전염병은 계속되었다. 에피메니데스(Epimenides)는 아테네인들이 ‘알지 못하는 신’을 화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아테네에 수많은 양을 풀어 놓고 양이 누워 있는 곳마다 제물을 바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바울은 이 ‘알지 못하는 신’을 위한 제단 중 하나를 관찰하고 복음을 전할 때 인용하여 사용했다.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 그리스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표현한 것이다. 바울이 사용한 두 인용문은 그리스 철학자이자 시인들의 말이었다. 첫 번째는 크레타의 시인 에피메니데스의 것으로 “그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였고, 두 번째는 시칠리아의 시인 아라투스(Aratus)와 클레안데스(Cleanthes)의 “우리는 그의 소생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창조주를 알지 못하는 문화에서도 모든 인간은 어떤 신적인 존재 덕분에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고백이 가능하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관계를 형성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살고, 움직이고, 존재한다. 그분이 우리 몸에 생명을 불어넣은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살 수 있었고,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계속 살아간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쉬고 그분께로 돌아가는 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그분이 우리 생명의 원천이자 세상에서의 목적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시편 36편 9절은 하나님이 빛의 원천이시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움직인다. 우리는 그분으로 인해 매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육체적인 힘이든 정신적인 능력이든 우리는 오직 하나님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움직이시고 끊임없는 공급을 통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형제와 자매들에게 같은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요한일서 4장 11절은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하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곳에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그분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가질 수 있다. 모든 피조물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유지된다(골로새서 1:16-17). 하나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든 진실은 바로 하나님을 나타낸다. 머리카락부터 발끝까지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의 각 부분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고, 사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마치 바다의 물고기처럼 그리스도 임재의 바다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의 삶은 예수의 마음과 정신, 바로 그 임재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분은 우리 주변에 편재하여 계신다. 이보다 더 가깝고 친밀한 존재는 없다. 초월적이며 동시에 내재적이라는 신학적인 함의가 때로는 너무 심오하게 다가와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 구체적인 용어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때도 있다. 흔히 사용되는 부적절한 일련의 비유들을 열거하자면, 우리는 별과 같고 그분은 우주와 같을 수도 있다는 것과, 우리는 위대한 교향곡의 음악가이고 그분은 지휘자이자 악기이며 동시에 청중이라는 표현, 그리고 우리는 무지개와 같고 그분은 태양, 비, 언덕일 수도 있다는 내용들이다.

   이 비유들 중 어느 것도 올바른 관계를 포착하지는 못하지만, 우리 주님이 가까이 계시며 인간의 질병을 치유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는 것처럼 창조세계의 질병을 치유해달라고 간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분은 또한 어떤 장소와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창조 신앙의 영감과 생계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자를 치유하실 때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더 이상 죄를 짓지 말라고 요청하셨다. 여기에는 죄와 연관된 질병에 대한 인간적인 차원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그분의 친밀함은 변화의 과정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에 복종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우리가 그분을 본받고 그분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때 그분은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을 정화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지만 우리는 기꺼이 들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께 기도하면 그분은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기도에 어떤 형식으로든 응답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시며 필요할 때 우리에게 오시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구절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려는 경향에 주의해야 한다. 이 약속은 단순히 습관에 따라 그분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만으로 기도가 성취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그러려면 우리가 계속해서 그분께 다가가 그분 안에 있어야 하며, 그분의 ‘이름’인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창조 중심적인 치유와 회복에 대한 교훈이 있다. 예수께서 사람들을 치유하실 때 죄에서 떠날 것을 요청하셨던 것처럼, 창조세계가 생태적으로 악화된 상황에서도 지속적인 치유가 나타나기 전에 황폐화의 원인이 우선 제거되어야 한다. 우리는 문제의 뿌리를 보기 위해 기도할 수 있고 영감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 있지만, 회복을 실제로 실현하는 것은 우리가 직접 행동해야 할 구체적인 일이다.

   서구 신학의 역사에서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계몽주의 이후 오랜 세월 신학이 변천하면서 창조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의 임재 의식이 신학자보다 시인들에 의해 더 많이 보존되었다는 점이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사도행전 17장 28절의 구절처럼 창조세계에 그리스도의 현존이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 신학 저술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시인들은 그것을 보존했다. 이 본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창조세계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가 가득한 세상을 묘사한다. 세상은 그 자체로 성스러운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임재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성스러운 곳이다.

   계몽주의의 가장 부정적인 유산 중 하나는 하나님이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하나님은 먼 하늘에 존재하시고 사람들은 죽은 후에야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이신론적인 생각이다. 스스로를 신학이라고 불렀던 이 철학은 창조의 모든 측면을 정량화하고 계산할 수 있는 엄격한 수학 법칙과 원리에 따라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작동하도록 허용하는 일종의 기계적인 메커니즘으로 보는 것 외에는 창조세계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아울러 창조세계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의 생각은 점차 관심을 잃고 시들해졌다.

   흥미롭게도, 교회가 창조세계에 하나님이 어떻게 내재하시는지에 대한 명확하고 실행 가능한 신학을 발전시키고 표현하는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과 동시에, 창조세계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로 작성된 글에서 이 개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워즈워스, 테니슨, 롱펠로우와 같은 시인들은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직감했다. 하나의 예로 하나님의 영광이 창조세계에 드러난다는 진리는 롱펠로우의 시에서 다음과 같이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숙련된 간호사인 자연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말하길, “여기 이야기책이 있다./ 내 아버지가 너를 위해 썼어./ 이리 와서 나와 함께 거닐어라,” 그녀가 말했다./ “아직 밟지 않은 곳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필사본에서/ 아직 읽지 않은 것을 읽으렴”(The Manuscripts of God).

 

   하나님은 창조세계를 통해 우리와 가까이 계시며 기꺼이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예레미야 29:13)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형상대로 만들려고 고집하지 말고, 우리의 의지를 돌이켜 있는 그대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순전함이 필요하다. 창조세계에서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서나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박용범은 호남신대 신학과 교수로 교회와 학교 현장에서 창조세계의 다양성을 보존하고, 위기에 처한 생태계 회복을 위해 종교와 과학을 통합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전공(서울대 생물교육학)을 살려 『기독교 사회생태윤리』(새물결플러스)를 저술, 사회정의와 생태정의를 신학적 관점에서 추구하는 학문분야를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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