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등에 무거운 것이 떨어져 4주간 깁스를 하고 거의 3개월을 집에 틀어박혀야 하는 일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큰 사건이었지만, 다행히 수술은 하지 않을 수 있었고 다리를 쓰지 못하는 채로 거의 3개월 가까이 치료와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지난 5년 정도 쉬는 날 거의 없이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일을 했던 터라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강제로 주어진 휴식이 기뻤다기보다 매우 어색했다. 

   이런 부상을 당한 와중에 평소와 가장 두드러지게 달라진 신체적 변화가 있다면, 앙상해진 종아리와 허벅지였다. 물론 평소에 헬스장을 간다거나 시간을 내어 일부러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많이 걸어 다니는 편이어서 종아리와 허벅지가 어느 정도 두께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집에 누워있던 2주 만에 종아리와 허벅지가 너무나 앙상해져 버린 것이 아닌가. 하체는 물론이고, 상체도 근육이 쫙 빠져버려 거울을 보고 너무 놀랐다. 근육이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 빠져버릴 수 있냐고 의사에게 물어봤는데, 의사는 매우 자연스럽다는 듯이 “쓰지 않으면 그저 쭉 빠지지만, 다시 걸어 다니면 괜찮아진다”라는 매우 건조한 답변을 내놓았다.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게, 앙상해진 내 몸과 근육을 보면서 어떤 것이든 손실은 빠르고 쉬운 길이지만, 뭔가를 쌓아가고 늘려가고 더해가는 것은 어렵고 험난한 길이라는 걸 뼈저리게 몸으로 알 수 있었다. 하물며, 증대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현상 유지조차도 반복적인 단련이나 긴장을 주는 행위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

   크리스천이 매주 교회를 출석하고, 반복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고, 말씀을 가까이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근본적인 신앙의 물음을 제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교류와 소통이 크리스천이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는 모든 것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이는 단 한 번의 깨달음과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이 구원의 모든 것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군가 그리 말했다면, 그것은 일부러 신앙을 복잡하게 꼬아놓아 아무도 거기에 접근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했던 바리새의 신앙에 저항하기 위한 말일 것이다. 헌금을 하고, 교회생활을 하고 개인적으로 영성의 수련을 하는 것이 바리새의 행태처럼 그렇게 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괄시하고 상처를 주는 결과를 낳는다면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크리스천이 자신의 신앙 정체성을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반복된 신앙의 일상, 즉 예배와 기도, 말씀의 묵상 등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제는 아주 단순하고 아무렇지 않은 일이라 보일 수도 있으나, 그걸 하지 않았을 때 옅어질 수밖에 없고 흔들릴 수밖에 없는 신앙의 뿌리를 그리스도에게 깊이 내리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신앙의 실천 행위인 것이다.

저작권자 © 주간기독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