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故 도여수(루츠 드레셔) 선교사
◇ 故 도여수(루츠 드레셔) 선교사

 

   지난 2월 15일 한국기독교회관 조에홀에서 故 도여수(루츠 드레셔) 선교사 추모식이 거행되었다.

   도 선교사는 독일 서남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1987년부터 1995년까지 한국기독교장로회 선교동역자로 일했다. 한국에서 산 기간은 10년도 안 되었지만, 서울 외곽 가난한 마을의 민중교회에서 일했고 한국 사회에 깊이 녹아들었다. 독일로 돌아간 뒤에도 복음선교연대(EMS) 동아시아와 인도 담당 국장으로 오래 일하면서 한국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를 아는 많은 친구들이 추모식장을 가득 메웠다. 참석자들은 한국말을 참 잘했고 때로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던 그를 감사와 사랑으로 추억했다.

   1953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난 루츠 드레셔는 종교교육과 교회공동체 디아코니아를 공부했다. 바덴 주교회에서 일하다가 34살의 나이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 왜 왔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그는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다. 실제로 그는 그렇게 겸손한 자세로 살았고 누구에게도 독일이나 유럽 방식의 신앙이나 행동을 가르치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자신의 삶과 믿음, 존재를 풍요롭게 한 통찰력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저는 1987년 3월 연세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그 대학은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의 현장이고 행동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현장에 계셨습니다. 억압에 저항하는 곳, 또는 긍정의 힘이 표출되는 곳, 자유를 위해 행동하는 곳,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행동하는 곳이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현장에 계신다는 기적을 깨달은 후, 저는 항상 그런 곳에 있고 싶었고 그런 곳이 생겨나는 것에 기여하고 싶었습니다.”

 

   루츠는 서울 노원구 하계동의 ‘돼지마을’에 있는 영은교회에서 1989년 가을부터 6년 동안 활동했다. 800여 세대가 축사를 개조한 판잣집에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던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바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고 뛰어난 친화력으로 남녀노소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것을 특권이라 생각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을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 가난한 여성 몇몇과 함께 성경을 묵상하고 소박한 식사를 나누곤 했다. 힘들게 살면서도 신앙을 간직한 그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그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는 한국인들이 하나님께 온 맘으로 울며 호소하고 때로는 기뻐서 소리치면서 기도 가운데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관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졌다고 말했다.

 

   나의 독일 형님

   나는 1987년 명동성당 입구에 세워진 상계동 철거민의 천막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루츠는 한국에 막 도착해서 우리말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20대였고 그는 30대였다. 이듬해 나는 한국을 떠났고 1990년대에 독일 개신교 잡지에 실리는 그의 글을 종종 읽었다. 대부분 한국의 민중교회와 민중 신학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청년 시절부터 떼제와 가까웠던 그는 독일로 돌아온 뒤로 매년 일주일씩 떼제에 와서 침묵 피정을 했다. 공동체에서 독일을 담당한 나는 독일과 떼제에서 그를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남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긍정적인 면을 확인해 주면서 격려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나는 9살 많은 그를 자연스럽게 ‘형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한 가지 같은 꿈이 있었다. 어느 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북한에 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꼭 갈 거야!”라는 다짐과 “함께 기도하자!”라는 약속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2002년 봄, 우리는 평양의 보통강 호텔에서 조우했다! 인도주의적 지원 일로 북한에 갔던 나는 독일교회 대표단과 함께 함께 온 그와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에 감격하며 거듭 공동의 꿈을 나누었다. 루츠 형님은 계속해서 독일개신교연합(EKD),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을 연결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그는 조그련 인사들을 여러 차례 독일로 초대하고 독일 교회 대표단과 북한을 방문하면서 우정과 신뢰를 쌓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북한 사람을 더 깊이 이해했다.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에서 남도 북도 치유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던 그는 고정관념이나 편견과 의심에서 벗어나 북한 사람, 조선 인민들을 바라보려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 동안 북한의 사망자가 남한보다 훨씬 많았고(남한은 1백만, 북한은 250만 명),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했고 이런 배경 때문에 북한이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이해하려 했다. 그는 “우리가 사람들의 행위를 보기보다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면 그들을 사랑하기가 훨씬 더 쉬울 것”이라고 한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말을 지침으로 삼았다. 북한을 네 차례 방문하면서 그는 그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고 남한 사람을 사랑했던 것처럼 북한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도 우리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믿었고 그렇게 대했다.

   그의 하나님은 배타적인 분이 아니었다. 루츠 형님은 다른 종교인들과 격의 없이 지냈고 돼지마을에서는 무당과도 친구가 되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권위적으로 대하거나 경쟁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많은 일을 했지만, 마음의 평화를 간직했고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추구했다.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그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그는 한국과 독일, 유럽과 아시아, 남한과 북한, 그리스도인과 종교가 없거나 다른 사람 사이의 경계를 넘고 다리를 놓았다. 그 자신이 수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었고 또 그들을 서로 연결해 주었다.

 

   감사한 경이

   루츠 형님은 은퇴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남북의 화해와 통일을 위해 일하고 싶었지만, 건강이 발목을 잡았다. 요양 생활하면서 그는 더욱 관상적인 삶을 살았고 기도로써 많은 이들을 동반하며 격려해 주었다. 지난 12월 프랑스에 잠시 갔을 때 그와 긴 통화를 했다. 여전히 우리는 한국/조선을 얘기했다. 이 인정 많은 남독일 사람은 한국/조선에 자신의 일부를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늘 그렇듯 우리의 대화는 기도로 끝났다.

   그는 믿음과 기도의 사람이었다. 성경 말씀은 그의 매일매일의 삶과 모든 활동의 원천이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면서 동시에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기도와 사회적 책임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홀로 산길을 걷거나 깊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이 있었기에 빈곤과 불의의 현장에서 고난받는 이들과 연대할 수 있었고 사회 변혁의 현장에 뛰어든 학생과 노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기도의 골방에서 길어 올린 샘물로 모든 이들을 대했다.

   한국인의 아픔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평화를 향한 여정에 동행하는 것을 자신의 특별한 소명으로 여겼던 루츠 드레셔, 도여수 선교사.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 그는 지난해 부활절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아무것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에 커다란 해방감을 느낍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내 삶은 ‘펼쳐진 책과 같습니다’ - 시편 139편은 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모든 빛과 그림자, 모든 내적 모순과 함께 온전히 ‘인정’됩니다. 헤아릴 수 없는 자비의 흔적이 여기에서 발견되고 감사한 경이만이 남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정교회 전통의 부활 이콘 얘기를 했다. 새로운 창조의 시작이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세계에 있는 아담에게 손을 뻗으시는 성화다. 그가 옮겨 적은 정교회의 부활 찬송에 이콘의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 죽음으로 죽음을 멸하시고, 무덤에 있는 자들에게 생명을 베푸셨나이다!”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바친 루츠 형님을 기억하면서, 그를 우리에게 보내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도 같은 찬송을 부른다.

 

◇ 정교회의 부활 이콘
◇ 정교회의 부활 이콘

 


신한열은 프랑스 떼제공동체에 살면서 30년 이상 유럽과 동아시아를 오가며 국제 젊은이 모임을 이끌었다. 2020년 한국으로 돌아와 비영리단체 이음새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서울시 문화다양성 전문강사로도 일한다. 쓴 책으로 『함께 사는 기적』(신앙과지성사)이 있다. ‘수사’는 직분이나 직책이 아니라 개신교의 ‘형제’와 같은 호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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