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 후반부 인간관계는 점조직처럼 연결되어 있는데, 그 시작점에는 거의 다 한국일이라는 사람과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다른 욕심은 없는데, 사람에 대한 욕심은 많은 사람이다. 마치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언덕에서 아래쪽으로 살살 굴렸을 때 그 눈사람이 점점 더 커지는 것처럼, 그의 인간관계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더 커지고 단단해지고 있었다.

 

   사역의 지평을 넓혀준 두 교수

   그의 인간관계 그물에 내가 걸려들었던 계기는 장신대에서 기획처장을 하고 있을 때, 한 학생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게 된 사건과 연관이 있었다. 당시 생활관장을 박보경 교수가, 경건교육처장을 한국일 교수가, 그리고 나는 기획처장을 맡고 있었다.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학생의 가족을 위로하고 법의 테두리 안에서 목양의 관점으로 그의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 세 사람의 일치된 견해였다. 그래서 학생의 가족과 나는 또 다른 식구가 되었다.

   박보경 교수는 남편, 故 장요한 목사와 더불어 수년 전에 이미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거기에도 한국일 교수가 있다. 박 교수와 나는 한 교수를 장신대의 총장으로 추대하기 위하여 한동안 노력을 기울였는데, 본래 정치 감각이 없었던 박 교수와 나는 한 교수를 총장으로 선임되게 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오랜 세월 정치적 끈을 잡고 준비하고 있던 다른 후보자가 당선되었다. 지나고 보면 그때 만일 한 교수가 장신대 총장이 되었다면, 장신대는 선교적 정신을 조금 더 실천하며 좀 더 따뜻한 글로컬-에큐메니컬 기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조용히 웃으며 생각해 본다.

   결국 정치적 경험이 일천한 두 교수 참모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선거운동을 하였기에 낙선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배운 것이 많았고, 순수함과 열정만 가지고는 안되며, 오랜 기간 동안 총장 준비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한국일, 박보경, 김도일이 함께 만들어 본 믿음경영의 다섯가지 원리
◇ 한국일, 박보경, 김도일이 함께 만들어 본 믿음경영의 다섯가지 원리

 

   아둘람의 집

   박보경 교수는 그 후 남편 장요한을 하나님의 품에 보내드렸고, 모든 장신대 공동체원들은 함께 애도하며 박 교수를 위로하였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었음에도 박 교수는 슬픔 가운데서도 놀랍게 자신의 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오히려 더 맹렬하게 사역의 깊이와 넓이를 다져 나갔다.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이전보다 더 활기찬 여전사로서 자신의 일을 구체적으로 확장시켜나가며, 세계선교학회장, 얌스회장, 한국선교신학회장, 학과장, 도서관장 등의 일을 멋지게 수행해 나가고 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서 공부를 계속하기 어려운 박사과정생들과, 박사가 되었으나 길을 개척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전문가들, 그리고 공부하고 사역하다가 몸과 마음에 상처가 깊어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서후리에 <아둘람의 집>을 만들었다. 이들이 하나님과 독대함으로서 영육 간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하는 사역을 수행하는 것이다.

   한 교수와 나는 가끔 아둘람의 집에 들러 기도하고 설교도 맡으면서 박 교수의 사역을 지원하고 있다. 부모의 고향이 평안북도 의주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세 교수는 무슨 일이든 화끈하게 불같은 성정으로 감당한다. 자신의 몸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아둘람의 집에서 하나님과 독대하고 치유를 경험했다는 적지 않은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걸 보면 그 사역은 분명 하나님이 이 시대에 원하시는 사역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아둘람의 집, 쉼과 회복이 필요한 이들이 와서 마음껏 부르짖고 기도하는 집
◇ 아둘람의 집, 쉼과 회복이 필요한 이들이 와서 마음껏 부르짖고 기도하는 집

 

   가락재영성원

   정광일 목사는 약 30년 전에 기존 교회의 목회 형태만으로는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현대인의 삶에 멈춤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설악IC에서 30분 걸리는 곳에 있는 저렴한 땅을 온갖 우여곡절 끝에 마련하고, 여러 돕는 손길과 함께 <가락재영성원>을 시작하였다. 그도 역시 한 교수의 절친으로서 자연스럽게 나와 연결이 되었다.

   그곳은 여러모로 열악한 환경이었고, 통일교의 대궁전이 산기슭에 자리 잡은 이후에는 식수마저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장소였지만, 정 목사의 올곧은 ‘숨-쉼-섬’의 신학은 오늘날 많은 울림을 주고 있다. ‘쉼’이라는 신조어는 그로 인해 창조되었다. 한 번은 신대원 3학년생들과 사경회를 가락재에서 갖게 되었는데, 학생들이 얼마나 고마워하고 행복해하는지 그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2024년 설날을 며칠 앞둔 어느 날에도 나를 포함해 목사 박성원, 김성진 부부, 한국일, 정광일 부부와 함께 가락재영성원에서 담소를 나누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40, 50년지기 친구였다. 신대원생들은 2박 3일을 함께 하면서 나를 포함한 목사 안광수, 정광일, 강동진의 간증과 설교에 동참하고, 서로의 인생 스토리를 나누면서 앞으로 펼쳐질 하나님 나라의 사역에 대해 함께 기도하고 꿈을 꾸었다.

   세월은 계속 흘러가고 우리 육신은 후패해져 가고 있지만, 하나님 은혜의 역사라는 강은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다 티끌 같은 존재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신뢰하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계시며,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역사를 지속적으로 만들어가고 계심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이때에도 그분은 나와 함께 길을 걷고 계셨음을 사무치게 느끼며 고백한다.

 

◇ 2016년 가락재에서 신대원생들과 사경회를 갖던 밤. 故 류은정교수도 동참했다.
◇ 2016년 가락재에서 신대원생들과 사경회를 갖던 밤. 故 류은정교수도 동참했다.
◇ 가락재영성원의 정신을 알 수 있는 액자, 삼자 정신이 참신하다.
◇ 가락재영성원의 정신을 알 수 있는 액자, 삼자 정신이 참신하다.
◇ 숨, 쉼, 섬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가락재영성원

 


김도일은 장신대 기독교교육학과 교수로 한국기독교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며 다음 세대를 세우고, 가정교회마을연구소 공동소장으로 이 땅 위에 하나님나라를 확장시키는 일에 힘쓰고 있다. 이 지면을 통해 삶 속에 구체적으로 역사하시며 이끌어 오신 그분의 발자취를 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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