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로 가천대 길병원은 2016년에 IBM사의 AI 암 치료 프로그램인 ‘왓슨 포 온콜로지(Watson For Oncology)’를 도입하여 인공지능암센터를 운영하였다. 2016년 12월 자 한 주간 신문 기사에 의하면 대장암 3기 진단을 받고 길병원에서 복강경 수술을 받았던 환자가 재발 방지를 위해 항암 치료가 필요했기에 인공지능암센터를 찾았다. 의료진은 환자의 나이, 몸무게, 실행한 치료법, 전신 생체 지표, 암 관련 혈액검사, 유전자검사 결과, 조직검사 결과 등을 왓슨 시스템에 입력하였다. 그러자 불과 7초 만에 왓슨은 적합한 진단과 함께 치료법을 제시했다. 왓슨이 추천하여 내린 처방은 항암제 병합요법으로서 외과, 병리학과, 종양내과 등 교수들이 협동 진료하여 내린 처방과 같았다.

   한 달 뒤 2017년 1월, 같은 주간 신문은 “닥터 왓슨과 의료진 항암처방 엇갈리면… 환자 ‘왓슨 따를게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내용인즉슨 암 진료를 하면서 의사와 왓슨의 처방이 엇갈리면 누구의 처방을 따르겠냐는 질문에 대다수 환자가 의사가 아니라 왓슨을 따르겠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다른 기사에 의하면 질문을 받은 환자의 80%가량이 그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의사가 아니라 왓슨의 처방을 따르겠다는 말은 인간이 아니라 AI의 처방을 따르겠다는 말이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심각한 결정을 내리는 데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이 생길 때, 인간이 아니라 AI의 조언을 듣고 따르겠다는 대답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조언을 해주는 인간이 최고의 전문직에 종사하는 의사인데, 인간 의사가 아닌 AI의 말을 따르겠다는 대답이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소식을 접하며 유념해야 할 점은, 이것이 단지 ‘인간이냐 AI이냐’라는 식의 단순한 양자 비교 혹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 믿고자 하는 대상은 누구인가’라는 보다 근원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즉 이것은 ‘신뢰의 문제’이다. 실제로 의료분야에서의 AI 활용과 관련된 포럼과 콘퍼런스에서 가천대 길병원 신경외과 이언 교수는 길병원에서 왓슨을 도입한 이유가 환자로부터 ‘신뢰’를 얻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소위 의료 쇼핑과 환자 쏠림 현상의 원인이 병원과 의료진에 대한 환자의 신뢰 부족이기에 왓슨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현상을 완화시키고자 함이라는 것이다. 또한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평균 진료시간이 짧은 병원의 진료 현실 속에서, 과연 의사가 신뢰할 수 있는 진단을 내릴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는 환자들에게 AI 시스템을 도입함으로써 진료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신뢰(信賴)란 믿고(信) 의지한다(賴)는 뜻이다. 신앙인(信仰人)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곧 신뢰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리 개신교의 출발이자 근원도 신뢰요 신앙이었다. 16세기에 95개 조항을 제시하며 당시 가톨릭교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고발하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의 종교개혁 정신은 ‘Three Solas(세 가지 은혜)’라는 라틴어로 요약된다[Sola Fide(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오직 은혜로)’, ‘Sola Scriptura(오직 성경으로)]. 이 세 가지 중 우선이 되고 으뜸이 되는 것은 당연 ‘Sola Fide(오직 믿음으로)’이다. 루터에게 큰 깨달음과 울림을 주었던 성경 말씀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를 필두로 흔히들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 일컫는 믿음 우선, 믿음 중심의 기독교 신앙관은 바울 서신서 전반에 걸친 핵심 중 핵심 내용이다.

   ‘오직 믿음으로’의 개신교 신앙관을 이 시대에 되새겨보는 데 있어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점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이 다른 어떤 것보다 믿음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달아야 한다는 점만이 아니라, 다시금 깨달아야 할 만큼 중요한 믿음의 대상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진정 누구인지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믿음을 강조하는 데에 있어서 루터가 믿음과 분명하게 대비시킨 것은 율법의 행위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는 바울 서신서의 말씀을 통해 비본질적인 율법의 내용에 얽매여 행위로써 의에 이르려 하는 당시 가톨릭교회에 만연해있던 왜곡된 신앙관을 직시하고, 복음의 본질인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일컬음을 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개혁의 메시지였다.

   그런데 복음의 본질을 찾아내기 위해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대비시킨 바울의 서신서에서도, 이를 보석처럼 발굴해 내어 종교개혁의 물꼬를 튼 루터의 메시지에서도, 믿음이나 율법이나 대비되는 이 둘 모두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셨다. 심지어 비록 잘못되었지만,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롭다 일컬음을 받고자 한 가톨릭교회의 대상도 하나님이셨고,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일컬음을 받고자 한 종교개혁 교회의 대상도 역시 하나님이셨다. 특히 개신교인에게 믿음과 율법의 행위 사이의 논쟁에서의 정답은 오직 믿음이다. 이천 년 전 바울의 시대나, 오백여 년 전 종교개혁의 시대나, 작금의 21세기나 복음의 핵심은 믿음 우선, 믿음 중심인 것은 자명하다. 이때 그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은 더욱더 자명하고 너무나도 당연하여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 신앙인의 문제는 이처럼 너무 자명하고 너무 당연하여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는 바로 그 부분에 있다. 그처럼 중요하다고 강조하여 말하는 믿음의 대상이 정말 하나님이 맞느냐는 것이다. 당신이 신앙인으로 불릴때의 그 신앙(믿음)의 대상이, 오직 믿음으로라는 개신교의 전통을 이해하고 되새기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당신의 믿음의 대상이 정말로 하나님이 분명하냐는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의 중요성을 이처럼 되새기고 있는데, 실제 우리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 속에서 자명해야 하고 당연해야 할 믿음의 대상이 하나님이신지가 뚜렷하지 않다면, 이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있는 의료 진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처방을 받는 환자가 비기독교인이라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의 범주에 하나님은 들어있지 않을 것이므로, 항암처방이 엇갈릴 경우 누구의 처방을 따를 것인가에 관한 위 신문 기사의 논쟁에서 신뢰의 대상은 인간 아니면 AI다. 이때 신뢰의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AI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사실, 그것도 80%나 되는 대다수 환자가 AI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사실임이 틀림없다. 그해 2016년 초, 이세돌 프로 9단과 구글 알파고의 바둑대결에서 인간이 이길 것이라는 대부분의 예상을 깨고 AI가 4:1로 대승한 경우 못지않게 놀라운 사실이다. 바둑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인 인간 프로 9단을 AI가 실력으로 이겼듯이, 의료 분양에서 최고 전문가인 인간 의사를 AI가 신뢰도에서 이긴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암 처방을 받는 환자가 기독교인일 경우에는 어떠할까? 신뢰하고자 하는 대상에 있어서 기독교인이라고 근본적인 차이가 있을까? 개신교의 기본 정신인 오직 믿음으로의 대상이 하나님임을 당연히 알고 있는 신앙인이라고 해서, 나는 인간도 AI도 아니라 하나님을 가장 신뢰한다며 암 처방과 같이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하나님을 신뢰 대상의 범주에 먼저 포함시키고, 그다음 다른 신뢰 대상을 고려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 될 수 있을까?

   성경에서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를 읽어나가다 보면, 역대 이스라엘 왕들이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부류는 다른 신(우상)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왕이고, 둘째 부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우상)을 신뢰하는 왕이다. 안타깝고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신뢰하는 둘째 부류의 왕들은 너무나도 많아 대부분인 반면, 다른 신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첫째 부류의 왕들은 찾기 어려울 만큼 드물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첫째 부류의 왕들이 다시 세부적으로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이다. 그 한 부류는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왕이고, 다른 한 부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만 다른 신을 신뢰할 여지를 남겨놓는 왕이다. 후자의 경우의 예를 들면, 열왕기상 15장에 나오는 아사 왕이다. 아사는 다른 신을 섬기던 악한 선조 왕들과 달리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엄청난 개혁을 시도했다. “아사가 그의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 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또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11~13절).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 구절 속에 있다. “다만 산당은 없애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14절). 산당은 없애지 아니한 것과 하나님을온전히 신뢰한 것이 공존한 왕 아사. 그를 오직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한 왕이라고 볼 수 있는가?

 

   암 처방을 받는 환자가 기독교인일 경우에 점검해보아야 할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다. 정녕 기독교인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의 처방을 따르느냐 AI의 처방을 따르느냐가 아니라, 그런 논쟁과 선택 이전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있냐는 것이다. 사실 둘 중 그 누구의 처방을 따르든 그것은 본인의 생각과 기준에 따라 정하면 된다. 아직 AI 발전의 초기 단계라 할 수 있는 현 의료 기술 수준에서 보면, 어느 선택이 되었든 그것은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든 AI든 그 무슨 대상이든, 그 신뢰의 대상들 이전에 하나님을 먼저 떠올릴 수 있어야 참 신앙인이리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고백이 생사를 가르는 어떤 선택에 있어서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우선적 신뢰의 고백이 첨가되지 않은 채 그 어떤 선택을 한들 그것은 기독교인의 올바른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산당을 없애지 아니하여 다른 신도 신뢰할 여지를 남긴 것이 아사 왕의 문제라면 문제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는 사실이, 그가 인생의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그 어떤 다른 신뢰의 대상 이전에 항상 하나님을 우선적인 신뢰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여부이다. 물론 문제 소지가 될 수 있는 산당마저도 없애어 완벽히 하나님만 신뢰했다면 더 좋았긴 했겠지만, 만약 그가 다른 신뢰의 대상 이전에 하나님을 언제나 우선으로 신뢰했다면, 산당은 그에게 신뢰의 대상 자체가 아니었을 것이고, 산당의 존재 여부는 하나님을 향한 그의 우선적 신뢰도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의료 처방에 있어서 인간 의사만이 신뢰의 대상이었던 예전에, 당신은 신앙인으로서 인간 의사를 신뢰하기 이전에 오직 하나님을 우선으로 신뢰하였던가? 세월이 흘러 AI 시대에 들어선 지금, 당신은 신앙인으로서 인간과 AI를 비교하며 신뢰의 대상으로서 고민하기 이전에 오직 하나님을 우선으로 신뢰하고 있는가? 사실 AI가 신뢰의 대상에 새로 추가되었을 뿐 이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동일하다. 결국, 인간의 처방이냐 AI의 처방이냐는 논쟁은 중요하지 않다. 산당이든, 인간 의사든, AI든, 그 무슨 신뢰의 대상이 우리의 고려 대상이 되든 상관없이, 더욱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신앙인에게 신뢰의 우선적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어야 마땅하다.


김동환은 기독교윤리학을 전공하고, AI를 비롯 첨단 테크놀로지를 신학적으로 비평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과학기술에 의해 강화된 인간인 포스트휴먼에 관한 급진적 철학사조 트랜스휴머니즘을, 학술 논문(2011년)을 통해 국내 신학계에 최초로 소개했다. 과학기술 문명 시대를 사는 인간을, 기독교 윤리적 관점에서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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